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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즘 이책] 절제의 사회
이름 변성래
날짜 2017/09/12 11:58:13 조회 35 추천 0


절제의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은이) | 박홍규 (옮긴이) | 생각의나무

      | 원제 Tools for conviviality

 

 

 

얼마 전 웹상에서 IT 쓰레기(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더미 위에 앉아서 놀고 있는 3~4세 정도 된 사내아이를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인도의 빈민가로 추정되는 곳. 분명 그 근처에서 그 부모들은 그 쓰레기 더미위에서 돈푼이 될 만한 것들을 추리고 있었으리라. 그 아이의 건강과 미래가 염려되는 사진이었다. 이 책을 깊이 읽기 전에 그 장면부터 떠올리게 된다. 다소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점과 거리가 있을지언정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 든다.

 

 

이 책의 지은이 이반 일리히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아일랜드 - 푸에르토리코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으며,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사제 확대정책에 반대한 것, 피임정책을 지지한 것 등 일련의 교회 정책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났다. 사제직을 떠난 후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서독의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 중세사를 강의하는 등 저술과 강의 활동에 전념했다. 2002122일 독일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Conviviality'란 말은 종래 '공생'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역자 박홍규는 일리히 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이를 자율적 공생으로 번역해야 그 뜻이 보다 선명해지기 때문에, 이를 '절제'로 번역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산업주의적 성장의 한계를 여러 차원으로 분석한 책이라고 시작하고 있다. 대량생산이 더욱 더 가속화하여 환경과 적대하게 되고, 사회구성원들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을 서로 소외시키고 인공적 껍질 안에 가두어버리면 사회는 파괴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과학적 발견이 최소한 두 가지의 반대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그 하나의 방향은, 기능의 전문화, 가치의 제도화, 권력의 집중화, 그리고 인간을 관료제나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하는 다른 방향은 개인의 능력과 통제력과 창의력을 확장시켜, 각 개인이 바라는 힘과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현대기술이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를 지은이는 '절제의 사회'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책임 있게 도구를 제한하는 하나의 현대사회를 뜻하는 기술적 용어라는 부언 설명을 하고 있다.

 

 

 

 

지은이는 사람들이 미래를 구상하는 작업을 전문적 엘리트들에게 양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미래를 열기 위한 틀을 만든다고 약속하는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있다. 미래조차도 하도급 하는 상황이다. 정치제도 자체가 생산고라는 목표와의 공모관계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예비기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는 제도화된 상품의 평등한 분배라는 의미로까지 타락하고 있다. 절제의 사회를 타인이 조작한 최소의 도구에 의해 모든 구성원들에게 최대의 자율적인 행동을 가능하도록 구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활동이 창조적인 정도에 따라 단순한 오락과는 반대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반면 도구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서 성장하게 되면 통제, 의존, 수탈, 불능이 증가된다.

 

 

지은이가 표현하는 도구(Tools)의 범위는 매우 넓다. 드릴, 그릇, 주사기, 빗자루, 건축자재, 모터와 같은 단순한 기자재만도 아니고, 자동차나 발전기와 같은 거대한 기계만도 아니고, 콘플레이크나 전류와 같이 만져서 알 수 있는 유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은 생산기술도 포함된다. 나아가서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 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생산체계도 포함시킨다. "절제의 사회에서는 정의를 위해 강제적이고 끝이 없는 학교화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평생의 특권을 위한 끝없는 사다리를 두고 벌어지는 강제적 경쟁은 평등성을 증대시킬 수 없고, 더 빨리 출발하거나 더 건강하거나 교실 밖에서 더욱 많은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자들에게 더욱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최근 사회적, 교육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선행학습'이 오버랩된다.

 

 

그렇다면, 지은이는 이 문제점들에 대한 회복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1)과학의 비신화화 2) 언어의 재발견 3) 법절차의 회복에 두고 있다.

 

 

개인의 확신을 정직하게 교환하는 절차는 개별 과학이나 전문가나 정당이 만든, 특별한 자격을 갖는 지식에 더욱더 의존함에 따라 부식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광고업자나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 오히려 그 자녀를 망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행하는 것만 아니라 인간이 바라는 것도 명사로 표현되는 상황이다. '주택공급'이라는 말은 활동이 아니라 상품이 되었다. 지식, 이동, 심지어 감수성이나 건강조차 획득한다고 한다. 일이나 즐거움을 (갖는다)고 하며 심지어 섹스도 (갖는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동사에서 명사로 탈바꿈한 '소유'에 대한 개념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법절차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할 말이 많다. 현대의 법과 법률가 대부분, 현대의 법원과 그 판결 대부분, 권리주장과 그 주장 대부분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산업주의적인 합의에 의해 심각하게 타락하고 있다. 그 합의란 더욱 많은 것이 더욱 좋다는 것, 인간보다 기업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이 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키워드는 '절제'이다. 일리히는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의 제도나 도구를 지향하기 위해 산업주의적인 타율적 제도나 기계의 무한 성장을 제한하자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이를 성장주의자나 욕망주의자가 아닌 제한주의자나 절제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소시민의 목소리는 크게 뭉치지 않으면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어둠 속 바람 앞의 촛불이 되고 말았다. 정의의 목소리를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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